개요
이 책은 13가지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세계 평균 여성의 학습 기간, 빈곤국에서의 아동 사망률 등 세계 정세에 대한 객관식 질문들이다. 나름대로 상식을 동원해 열심히 풀어봤지만, 결과는 13문제 중 단 2문제 정답이었다. 보기 3개 중 아무거나 찍는 침팬지의 정답률이 33%인데, 나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침팬지보다도 못한 성적을 거둔 셈이다.
나만 유독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그런 걸까? 놀랍게도 거의 모든 국가에서 사람들의 정답률이 침팬지보다 낮다고 한다. 개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정답률은 40%를 넘기기 힘들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대해 무지한 이유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진짜 사실이 아니거나 1980년대의 낡은 지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했지만 우리의 세계관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작가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인간의 여러 가지 본능으로 설명하는데, 그중에서 걱정, 권위, 다급함이라는 세 가지 본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걱정 본능
가장 높은 삶의 질을 누리는 4단계에 사는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문밖의 온갖 위험들을 끊임없이 걱정한다. 책에 따르면 비행기 사고의 비율은 0.000003 정도로 극히 희박하다. 이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내가 사고를 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무의미를 넘어선 손해다. 게다가 이미 사고가 난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통제할 수 없는 희박한 위험에 에너지를 쏟느니 차라리 걱정을 내려놓고 사실에 충실하는 편이 낫다.
이 걱정에 대한 이야기는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서도 읽었던 내용이라 더 깊게 와닿았다. 어쩌면 걱정을 대하는 방식은 표현만 다를 뿐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통제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면 계획이고, 그 외의 생각은 모두 걱정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생각은 비워내는 것이 좋다."라는 꽤 명쾌한 결론이다.
권위 본능
전문가에 대한 맹신도 경계해야 할 본능이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만, 그 외의 분야는 잘 모른다. 한 분야에 유식하다고 해서 다른 분야의 지식까지 저절로 전문가 수준으로 습득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망치를 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전문가들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단일한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이는 나 자신에게도 뼈아프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스스로를 대단한 전문가라고 부르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나 역시 내가 가장 잘하는 '프론트엔드 개발'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굳이 웹 서비스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문제나 사람들이 당장 필요로 하지 않는 것까지 코드를 짜고 UI를 붙여 서비스로 만들고자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그렇기에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벗어나 사회나 다른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한 번 더 걸러서 들어야 한다. 그들 역시 본인의 망치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본능이 유독 강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군은 무조건 다방면에 뛰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물론 그들이 새로운 학문을 접했을 때 일반인보다 학습 속도가 빠를 수는 있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전공만큼 다른 분야를 깊게 파고들었느냐는 점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의사이자 물리학자, 변호사이자 경영학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 그들의 전문 영역 밖의 지식은 우리와 비슷한 수준일 확률이 높다. 누군가의 권위만 믿고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다급함 본능
마지막으로 다급함 본능이다. 사람은 다급하다고 느끼는 순간 이성적인 사고를 멈추고 즉각적인 행동에 나선다. 호랑이를 마주쳤을 때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있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다. 즉, 다급함 본능은 생존을 위해 각인된 조상들의 유산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 정도로 생명과 직결된 위협이 드물다. 오히려 충분한 생각 없이 다급하게 내린 결정이 더 큰 문제를 불러오곤 한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은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눈앞의 마감 임박 세일에 충동적으로 결제 버튼을 누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급함이 느껴질수록 의식적으로 한 템포 쉬어가며 비판적인 사고를 켜야 한다.
여기에 더해, 이 본능은 개인의 인지적 자원 한도와도 연관이 깊어 보인다. 다급함은 순간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며 이성적인 판단력을 떨어뜨리는데, 이는 우리가 피로를 느껴 인지 능력이 고갈되었을 때의 상태와 매우 비슷하다. 투쟁-도피 반응이 발현되어 시야가 좁아진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상황의 다급함뿐만 아니라, '오늘 내가 인지 자원을 얼마나 소모했는지', '지금 내 머리가 맑게 돌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과정도 꼭 필요하다.
마치며
팩트풀니스는 내가 세상을 얼마나 낡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준 책이다. 극적인 본능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에 근거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에서 충격을 받으며 시작했지만, 책을 덮은 지금은 조금 더 객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과 맞닿아 있는 지점들도 많아, 세상을 이해하는 동시에 나 자신을 다스리는 데에도 꽤나 유용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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