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한 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니체의 영원한 회귀는 일반적으로 “세계의 모든 사건들이 일련의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반복된다”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두가지로 이야기 되는데 하나는 이미 다 정해져버린 것이니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회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도 살아있는 나를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대립되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옳고 그름의 가치와 같은 이분법적 가치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는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해서 이를 없던 것으로 치부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는 거짓이라는 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의,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의의에 집중을 해야한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이분법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왜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말을 하는 목적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며, 그 목적으로부터 영원회귀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가치를 찾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거 같지만 이는 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존재의 무거움을 뜻하는 국가, 정치 혹은 사상과 같은 가치와 존재의 가벼움을 뜻하는 자유로움, 관계를 끊어버림에서 나오는 무의미함을 구분지어준다. 국가와 정치, 사상과 같은 가치는 영원회귀의 가치와도 동일하다. 하나의 사상만 존재하지 않고 끊임 없이 다른 존재들과 대립되는 국가, 정치, 사상, 키치들은 영원회귀의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치이며 이 가치들이 왜 존재하는지 거짓말을 하는 건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해 사고 된다.
이야기
소설의 4명의 주인공, 토마시와 테레자, 프란츠와 사비나는 이 끊임없는 영원회귀, 무거움의 가치 속에서 가벼움의 가치를 알아내고자 고군분투한다. 두 커플은 각자의 영역에서 교차점을 만들며 서로가 택한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논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영역으로 대척점에 서서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첫번째 커플인 토마시와 테레자 커플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서로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토마시는 해당 관점에서 가벼움을 테레자는 무거움을 표방한다. 둘의 사랑의 관점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다르게 보여진다. 토마시가 테레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동정심에 가깝다. 토마시는 감기 고열을 앓고 있는 채로 아파트에 찾아온 테레자를 바구니에 담겨 온 어린아이로 본다. 그에 비해 테레자는 토마시와 책을 통해 이어진 관계로 보며 토마시를 통해 자신이 있던 저급한 사회에서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토마시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그에 비해 테레자는 육체가 영혼, 즉 정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조 관념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고 토마시가 다른 여자들과 자고 오는 것을 질투하고 고통을 겪는다. 자기도 토마시와 같이 이런 정조 관념을 버리면 무거운 존재에서 가벼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단 한 번 정조 관념을 버렸을 때 그녀는 죄책감과 허무함만이 남게 된다.
두번째 커플인 사비나와 프란츠 커플은 사상의 관점에서 서로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사비나는 누구보다도 가벼운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전체주의인 자신의 나라에서 하는 모든 행진들을 거부한다. 사람들이 그녀를 고발하고 불이익을 준다고 해도 그녀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그 어느것에도 속해있지 않고 싶어하는 그녀는 그녀의 행동을 ‘배신’으로 묘사한다. 토마시를 만났을 때 배신의 측면에서 본 사랑이 토마시와 닮아있었기에 잘 어울렸고, 프란츠와의 정적인 사랑에는 끊임없이 배신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느꼈다. 사회가 제시하는 것, 키치, 어느 것도 따르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의 가벼움을 추구한다. 허나 프란츠는 그녀가 배신한 모든 것들을 동경한다. 그녀를 좋아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가 배신한 것들, 그녀가 배신한 키치를 좋아하는 것이었으며 그동안 자기가 지켜왔던 무거움을 사비나의 무거움으로 옮기는 과정을 겪게 된다.
키치
이야기의 6장부터 나오는 키치는 미학에서 보기 괴상한 것, 저속한 것과 같은 사물을 뜻하는 미적 가치를 말한다. 19세기 중후반 뮌헨의 그림 상인들이 빠른 시간에 만들어진 싸구려 미술품을 판 데에서 그 어원이 유래했다. 처음에는 저렴하고 저급한 예술품을 의미한 속어에 가까웠다. 이후에는 양산형으로 복제가 되거나 기존 작품들을 합쳐 만든 조악한 모조품과 기괴한 작품을 키치라고 불렀다.
키치라고 함은 괴상한 것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괴상한 것, 저속한 것 그 자체를 키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급품이고자 하는 괴상한, 저속한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괴상한 것이 스스로 괴상한 것이고자 한다면 그건 키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가 C급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예술품이 아니라, 이리저리 사탕발린 말로 대중을 현혹하여 실상은 C급이지만 A급을 표방하고 있는 그런 예술품이다.
이런 키치는 이후 팝아트의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대중문화적 이미지를 미술 영역으로 적즉적으로 수용한 구상미술의 한 경향인 팝아트. 대량 소비 사회에 맞게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여 나온 미술의 형태인데, 양산형의 복제를 의미하는 키치가 이 팝아트 정신의 근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런 키치를 작품속에서 조금은 다르게 이야기를 했지만, 위의 현혹의 의미에서 정의했다는 것은 같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두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첫 번째 눈물은 아이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지만, 두 번째 눈물은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감정도 같이 넣어 묘사했다. 작가가 키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있는 그대로의 묘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감상을 넣어 묘사를 왜곡 시키는 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키치다.
작가는 이 키치를 무거움의 존재라고 말한다. 무언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같이 믿는, 하나의 고귀한 사상이 아니라 그저 복제되었을 뿐인 것, 바로 사상을 무거움의 존재이자 키치라고 본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키치만이 남게 된다. 진실을 왜곡하는 무언가만이 남아 그 존재를 대신하게 된다. 미국 여배우의 커다란 사진 한장은 캄보디아에 대한 거짓된 슬픔을, 토마시의 죽음은 기독교를 멀리했지만 가까이 했던 거 같은 비문을, 프란츠의 비문은 오랜 방황을 남기게 된다. 그 어떠한 것도 그들을 대표하지 못했고 결국엔 거짓만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그 누구보다 가벼움을 원했던 사비나 역시도 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결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의 의미는 영원회귀 키치에서 나오게 된다. 결국에는 거짓만 남을 너무나도 가벼운 자신을 무거운 존재로 감싸 숨기고자 하지만, 그 무거움에 짓눌려 거기에 벗어나고자 하는, 벗어나고나서는 다시 그 무거움을 그리워하는 그런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나온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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