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결핍은 왜 피할 수 없는가
결핍은 단순히 무언가를 적게 가졌을 때 느끼는 불쾌감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대적인 감각이다. 아무리 풍족한 삶을 살아도 부족함의 기준(역치)은 '블루 닷 효과'처럼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한 사람의 인격이 그가 겪은 결핍의 크기로 정의된다고 말할 정도로, 결핍은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 책은 이러한 결핍의 메커니즘을 4가지 핵심 개념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 결핍: 무언가가 부족한 상태 그 자체.
- 대역폭 (Bandwidth): 우리가 인지하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정신적 용량. 결핍 상태에 놓이면 이 대역폭이 급격히 낮아진다.
- 터널링 (Tunneling): 대역폭이 낮아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 터널 속에 들어간 것처럼 당면한 한 가지 문제에만 과몰입하여 다른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되는 상태다.
- 느슨함 (Slack): 결핍의 반대 개념이자 마음의 여유(+). 느슨함이 충분할수록 갑작스러운 결핍 상황을 큰 문제 없이 넘길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일이 과도하게 쌓이거나 '느슨함'을 전부 소모했을 때 발생하는 인지적 과부하를 '대역폭 세금(Bandwidth Tax)'이라는 개념을 통해 명료하게 설명한다.
문제 진단, 가난은 왜 반복되는가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인데, 이 책은 결핍이 발생하는 원인만큼은 굉장히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대출을 받아 장사하는 상인들의 이야기였다. 이들은 대출로 물건을 떼어와 팔고, 그 차익으로 다시 대출금과 이자를 갚는 위태로운 삶을 반복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번 돈의 일부를 조금씩 저축해서 다음번엔 대출 없이 장사하면 이자를 낼 필요도 없지 않나?'라고 생각하기 쉽고, 실제로 그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당장 내야 할 이자와 물건이 팔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걱정은 이들의 '대역폭'을 심각하게 줄어들게 만든다. 정신적 여유가 고갈된 상태에서는 저축이라는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가들은 이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주어 '잠재적 저축 실천자'로 만들어 보았다. 더 이상 위태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빚 없는 출발선을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하게도,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예전의 빈자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유는 바로 축의금이나 부조금 같은 '갑작스러운 지출'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런 경조사비 지출 부담이 상당하다고 한다.) 이들은 이런 돌발적인 지출 상황을 마주하는 순간, 다시 시야가 좁아지는 '터널링' 상태에 빠져버린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면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모아둔 돈을 전부 써버리고 다시 예전처럼 빚을 내어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삶의 예기치 못한 충격을 흡수해 줄 충분한 느슨함이 없었다는 것이 뼈아픈 원인이었다.
진단은 있으나 '나'를 위한 처방이 없다
"그런 결핍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건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어쩌면 사회일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어쩌면 기업...
아니면..."
"음..."
이 책을 펼친 궁극적인 이유는 결핍을 없애는, 최소한 예방이라도 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결핍이 '왜' 생기는지에 대한 설명은 꽤나 납득이 갔다. 대역폭 세금, 느슨함, 터널링 같은 용어들을 통해 두루뭉술하게만 느껴졌던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점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왜' 생기는지는 명확히 나오는데, 정작 그것을 '어떻게' 없애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실천 방안은 나오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결핍을 당장 없애는 마법을 바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방적 측면의 조언조차 매우 빈약했다. 문제 상황만 주구장창 설명하다가 결국 "사회가 해결해 줘야 한다"고 결론 내리며 끝나버리는 전개는 다소 허무하게 다가왔다.
사회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이 가만히 앉아 사회가 나서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책이 방법을 아예 제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역폭 세금이 과하게 부과된 상태일 때는 중요한 선택을 피하라", "느슨함을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1. 운동해라 2. 건강하게 먹어라 3. 정신건강을 관리해라"라고 제시하는 것과 같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모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상 누구나 아는 저 뻔한 원칙을 이야기해 놓고, "저걸 제대로 실천하려면 사회가 도와야 한다"고 일갈하고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다.
빈곤층의 경우 극심한 결핍(터널링)으로 인해 계약이나 돈에 대한 인지가 떨어지고, 무지해지기 쉽다.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아 지식을 습득할 대역폭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해 사회, 프로그램, 기업이 나서서 도와야 한다는 책의 주장에는 깊이 동의한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와 당신은 아마도 책에서 말하는 그 극단적인 빈곤층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문제에 대한 인지가 있으며, 당장 사회의 구호물자가 필요한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잔인하게 결핍을 겪는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줄이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결핍이었으나, 책은 그 목적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했다.
여유(느슨함)가 있어야 더 집중할 수 있고 터널링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느슨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책의 뉘앙스는 결국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져야(사회의 물질적 지원) 가능하다는 식이다. 나는 마음의 느슨함이란 무조건 물질적인 여유가 뒷받침된 다음에야 생겨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며
누군가는 "당신은 책에 나오는 사람들만큼 가난하지는 않잖아"라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맞다.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극빈층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자에 속하지도 않는다. 따지자면 오히려 빈자 쪽에 가깝다. 왜 빈자에 가까운지는 밝히고 싶진 않다. 밝혀봐야 불행 대결에 지나지 않을 것만 같다. 뭐가 됐건... 그렇기에 이 책을 덮고 나서도 답답함을 해소할 수 없었다. 현실의 무게를 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느슨함을 유지하라'고 말하기엔, 이 책의 저자가 서 있는 위치가 너무 높고 멀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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